
운보 김기창의 초상화 자유로운 필력과 선택적 전통 수용
1) 생애와 화업의 전개
운보(雲甫) 김기창(1913–2001)은 서울 출생으로, 7세 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각을 상실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언어 장애라는 신체적 한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1930년, 17세의 나이에 모친의 인도로 이당 김은호 문하에 입문한 그는 불과 수개월 만에 스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듬해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첫 입선한 이래 6회 연속 입선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24세에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 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4회 특선을 기록하며 27세의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이력은 그가 당대 미술 제도권 내에서 얼마나 압도적인 재능을 발휘했는지를 방증한다.
김기창의 회화 세계는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과 역동적인 조형 감각을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구축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의 작업은 산수, 인물, 성화(聖畵), 풍속화에서 후기의 추상 회화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이는 특정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변혁을 꾀한 예술가적 투혼의 산물이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약 1만 5천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기며, 한국 미술사의 질적·양적 지평을 동시에 넓혔다.
김기창 작, <세종대왕 상>(정부표준영정) 1973년. 비단애 채색.
110x82cm. 여주 세종대왕유적관리소
2) 육리문법의 부분적 계승
운보(雲甫) 김기창은 이당(以堂) 김은호의 문하에서 월전(月田) 장우성보다 몇 년 앞서 입문하여 함께 수학, 동일한 학맥 위에서 예술적 여정을 시작했다. 두 작가는 초상화 제작에 있어서는 기법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구나 쉽게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통일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된 토대 위에서도 두 사람은 세부적인 면에서 각기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이들 두 작가는, 초상화를 포함한 회화 전반에 대한 인식과 전통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각자 개인의 성품만큼이나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 특히 초상화 작업에 국한해 볼 때, 운보의 방식은 전통 기법을 체계적으로 복원하거나 원형대로 재구성하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화면의 구성적 필요에 따라 특정 기법을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전통의 엄격한 계승보다는 현대적 조형미와 작가적 직관을 우선시했던 운보 특유의 예술적 태도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3) 육리문법의 제한적 사용
이러한 운보의 선별적 태도는 조선 시대 전통 초상화의 핵심 기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의 활용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운보의 초상화에서 육리문법은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등장한다. 그의 1952년작 <노인상>은 운보의 초상화 중 육리문법이 명확히 확인되는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
<세종대왕 상>: 왕실 초상의 전통 계승
김기창이 제작한 <세종대왕 상>은 국가가 공인한 정부표준영정으로,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엄을 현대적 회화 감각으로 재현한 대표적 작품이다. 화면은 정면관을 기본으로 하여 군주의 권위와 도덕적 품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단정히 앉은 자세와 절제된 색채는 조선 왕실 초상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온화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 균형 잡힌 안면 표현은 성군으로서의 인격적 면모를 드러내며, 의복의 세밀한 묘사와 안정된 구도는 궁중 초상화의 형식성과 장엄함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김기창 특유의 간결하고 현대적인 필치는 전통적 초상화법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여, 과거와 현재를 잇는 미학적 계보를 형성한다.
이 작품은 한국 초상화가 지닌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 즉 외형을 넘어 인물의 내면과 덕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적 상징으로서의 표준화된 이미지 구축이라는 현대적 요구를 반영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작품은 전통 왕실 초상의 형식이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되고 계승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노인상>
이 초상화는 육리문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사진에 의한 사실적 실재감을 위해 빛의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반면, 전후(戰後) 시기인 1952년에 제작된 <백낙준 박사 부인 초상>)에서는 육리문법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 인물의 고운 피부 결과 단정한 인상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회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운보가 육리문법을 모든 초상에 적용하는 보편적 문법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표현 수단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초상화 다수가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 추사(追寫) 초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생리적 사실성을 극단적으로 부각할 필요가 적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운보에게 육리문법은 조선 초상화의 본질적 전통이라기보다, 특정 조건에서만 소환되는 부분적 계승 요소에 머물렀다.

김기창 작. <백낙준 박사 부인상> 1952년. 비단에 채색. 39x46cm. 개인소장

세종대왕 상>: 인물의 권위와 상징성
운보가 제작한 이 작품은 일만원권 화폐 도안의 원본으로, 세종대왕의 성군적 위엄과 인간적 온화를 조화롭게 구현한 초상이다. 화면은 상반신 정면에 가까운 구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정한 자세와 절제된 배경은 인물의 권위와 상징성을 강조한다. 용보(龍補)가 장식된 곤룡포는 황금빛 문양과 붉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 왕권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세밀한 문양 묘사는 전통 궁중 초상화의 장식성과 격식을 충실히 반영한다. 얼굴 표현에서는 부드러운 음영과 섬세한 필선을 통해 온화하면서도 지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화폐 도안이라는 공공적 기능을 전제로 제작된 만큼, 개별 인물의 생리적 사실성보다는 국민적 상징으로서의 보편적이고 이상화된 군주상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전통 초상화의 전신사조를 계승하면서도 현대 국가 이미지 형성이라는 목적에 부응한 사례로, 김기창 초상화의 특징적인 절충적 미학을 잘 보여준다. 한국초상화의 기풍과 계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전통 왕실 초상의 형식과 권위를 현대 시각 문화 속에서 재구성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 된다.
운보 김기창 작. <세종대왕 상> 1975년. 비단에 채색. 120x85cm. 한국은행 소장

<조헌 상>: 강직한 성품과 결연한 의지의 초상화
조헌(趙憲 1544~15920)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충의와 절의를 기리는 정부표준영정이다. 화면은 정면관의 엄정한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단정히 앉은 자세와 균형 잡힌 상반신 표현을 통해 인물의 도덕적 권위와 정신적 기개를 강조한다.
두터운 수염과 단단한 안면 구조는 강직한 성품과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며, 절제된 필선과 담백한 채색은 인물의 내면적 엄숙함을 부각시킨다. 배경을 단순화하고 복식의 장식을 최소화한 구성은 시선을 인물의 얼굴에 집중시키며, 전통 초상화의 전신사조적 성격을 충실히 반영한다.
특히 이 작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순절한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하여, 생리적 사실성보다 충절과 정신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국가 표준영정으로서 요구되는 상징성과 도덕적 이상을 구현한 것으로, 운보 특유의 절제된 사실성과 이상화된 인물 표현이 조화를 이룬 사례라 할 수 있다.
운보 김기창 작. <세종대왕 상> 1975년. 비단에 채색. 칠백의총 소장
<조헌 상>은 전통 유학자 초상의 형식과 충의의 이념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역사 인물 초상이 지닌 기념성과 규범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반개법의 부재와 외현적 기세
한편 운보 김기창의 초상화에서는 반개법(半開法)이 전면적으로 부재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반개법을 통해 인물의 내적 정기와 정신성을 응축하려 했던 월전 장우성의 화풍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운보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눈을 온전히 뜬 개안(開眼) 상태이며, 명확한 윤곽과 시선을 통해 인물의 기개와 성격을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선택은 '전신(傳神)'을 관조된 내면의 응축으로 이해한 월전과는 달리, 인물의 영웅성과 성격을 외현적 기세(氣勢)와 동적인 필력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운보의 예술관을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반개법의 부재는 단순한 기법적 누락이 아니라, 초상화에서 정신성을 시각화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전통 인식의 차이. 재창안과 선택적 흡수
이러한 차이는 결국 운보와 월전이 지닌 전통 인식 구조의 근본적인 차이로 귀결된다. 운보 김기창은 전통을 특정 기법 체계로 복원하거나 이론적으로 재조직하기보다 자신의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 속에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월전 장우성은 근대에 이르러 전통의 단절된 맥락 속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의 핵심 정신과 기법을 재구성하고, 반개법과 운염(暈染)법을 통해 ‘전통의 재창안’을 시도했다.
운보에게 초상화는 전통 문법을 엄밀하게 계승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산수·풍속·성화·추상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조형 실험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육리문법이나 반개법과 같은 고도의 전통 안면 기법은 그의 초상화에서 구조적 중심 원리로 자리 잡기보다는, 화면의 사실성을 보조하는 지엽적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는 운보가 전통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현대적 조형 언어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으나, 동시에 조선 초상화의 기법적 정수가 희석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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