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무석 손연칠의 정부표준영정

천년의 걸물 2026. 4. 9. 16:52

손연칠 작. <가야 시조 이진아시왕 상> (정부표준영정) 2014년작. 비단 바탕에 채색.. 180x110cm. 고령 대가야박물관 소장

 

<가야 시조 이진아시왕 상>: 역사적 실존, 왕의 초상

작가는 기록이 미비한 가야 시조를 형상화하며, 고대 국가의 개척자로서의 강인함과 성군(聖君)으로서의 온화함을 완벽한 미학적 균형으로 구현해 냈다. 작가는 대가야 특유의 '금동관'과 복식을 철저히 고증하여 작품에 역사적 실체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전설적인 건국  시조가 지닌 신화적 신비로움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고대사의 위엄을 담은 정초(正初)한 조형을 현대적 필치로 되살려낸 결과다그는 전통 초상화의 핵심 기법인 배채법과 반개법 및 육리문 기법을 충실히 운용하여 화면의 깊이감과 조화로운 발색을 살려냈다. 안면 묘사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밀함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의 입체감을 가미하여 인물의 생리적 생명력을 극대화했다.

 

이진아시왕의 기개와 철학이 서린 눈빛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압도적인 지점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동자는 대가야의 기상을 대변하며, 이는 내면의 정신적 정수까지 포착해 내는 전신(傳神)의 경지에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손끝에 힘을 모은 모습은 백성을 섬기기 위한 내적 정신의 집중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붓끝으로 빚어낸 이진아시왕의 용모는 단순한 추정적 재현을 넘어, 민족의 뿌리 깊은 자긍심을 투영하는 상징적 매개로 기능한다. 요컨대, 고대 가야의 잠든 영혼을 깨워낸 손연칠의 영정은 기록 너머에 존재하는 역사의 진면목(眞面目)을 동시대의 시공간 속에 당당히 세워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통의 현대적 실천과 확장의 계보 

1) 불교미술의 토대와 일랑과의 만남

무석(舞夕) 손연칠(孫蓮七, 1948~ )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부 1기생으로 입학하여 인간문화재 석정(石鼎) 스님으로부터 전통 불화와 단청 기법을 사사하였다. 고등교육 체계 안에서 전통 불교미술을 수학한 최초 세대에 속하는 이러한 이력은, 훗날 그가 초상화라는 장르에 천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동방연서회에서 일랑 이종상을 만나 사군자부터 동양화의 기초를 재정립하였으며, 이후 김근중·김선두 등과 함께 일랑의 화숙인 랑우회(浪友會)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의 학습은 단순한 사사 관계를 넘어,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는 독자적인 초상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1977년 일본 야마토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고려불화 특별전'은 그에게 미학적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그의 대학 시절 은사인 황수영 박사와 동행했던 일랑 이종상으로부터 전시 자료들을 전달받으며 비단 바탕의 배채법(背彩法)을 통한 채색 기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로 1980년 고려불화 <지장도>를 모사하여 전승공예대전 장려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국내 작가에 의한 고려불화 재현의 효시로 기록된다. 이듬해에는 해인사 소장 국보 <영산회상도>를 모사하며 불교미술대전 종정상을 수상, 전통 기법의 숙련도에서 정점에 도달했음을 증명하였다.

 

2) 인물화로의 전환

손연칠은 "전통 불화를 공부하다 보니 일정한 한계가 보였고, ·보살상을 올바로 그리기 위해서는 인물화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목표가 보였다."고 회고한다. 이는 불교 회화의 규범적 도상의 재현을 넘어, 도상에서 인간의 형상과 그 내면에 깃든 정신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탐구로 회화적 지평을 확장했음을 의미한다.

 

무석은 스승 일랑으로부터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다양한 수련 과정을 거치며 초상화만의 독자적 특수성을 훈련받게 된다. 이후, 그는 화단의 두터운 신뢰와 일랑 선생의 추천으로 <의상대사>, <양만춘>, <허난설헌>, <이진아시왕>, <선덕여왕>,<양달사 장군> 등 무려 9점의 정부표준영정을 제작하여 일랑 초상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자리매김하며 국가의 시각 표상 확립에 기여하여 그 정밀한 필력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3) 일랑 이종상의 역할: 구조적 완결과 기준점의 형성

무석의 스승인 일랑 이종상은 근현대 한국 초상화가 도달한 하나의 구조적 완결점 이자, 후대 에게 전통의 계승 방식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이미 제도화된 초상 언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는 기준점이다. 일랑은 한국 화폐 초상을 두 차례나 전담하며 자신만의 독자적 조형 언어와 국가적 표상 체계를 완벽히 통합하였고, 이를 통해 초상화 인식의 내부 논리를 완성 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완결성은 후대 작가들에게 동일한 양식의 답습을 불허하는 심미적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4) 무석 손연칠로의 이행: 완결 이후의 응답과 전환

이러한 미학적 과제는 다음 세대 초상화가인 무석 손연칠로 이어지며 근현대 초상 인식의 또 다른 전환 국면을 예고한다. 무석의 초상화는 단순히 일랑의 양식을 계승하거나 연장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일랑에 의해 견고하게 구축된 기존의 언어와 조건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초상을 그려낼 수 없게 된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필연적인 응답이다.

 

따라서 두 작가의 관계는 단순한 수직적 사승(師承)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시대가 '완결'되고 그 너머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역사적 접점에 놓여 있다. 일랑이 국가적 표상을 통해 전통의 전형을 완성했다면, 무석은 그 완결된 토대 위에서 다시금 인간의 생리적 실재성과 정신적 깊이를 탐구하며 한국 초상화의 외연을 현대적으로 확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선덕여대왕 상. 부분도: 자비로운 광휘와 신라적 기품의 형상화

2018년에 제작된 선덕여대왕 상은 지혜로운 통치자이자 자비로운 광휘(光輝)를 지닌 군주의 면모를 현대적 필치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신라 왕실이 지녔던 정신적 품격과 통치자의 덕성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한 초상이다.

 

이 영정의 미학적 핵심은 인자함과 총명함이 공존하는 눈매의 표현에 있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선염법(渲染法)을 통해 피부의 온기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고, 입가에 머무는 미묘한 미소를 더함으로써 백성을 보듬는 군주의 자애로운 성품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절제된 표정 묘사는 인물의 내면적 품성과 통치자의 정신성을 동시에 환기한다.

 

신라 금관과 장신구의 표현 역시 주목할 만하다. 금속 특유의 질감과 광택을 정교하게 포착하면서도 장식적 화려함이 과도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절제된 조형 감각을 유지하였다. 이는 장식의 화려함이 인물의 본질적 기품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적 선택으로, 결과적으로 인물 중심의 조형 질서를 안정적으로 구축한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역사적 인물을 표준영정으로 재현하는 작업은 자칫 도상의 도식화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섬세한 표현과 온화한 색채의 중첩을 통해 살아 있는 여왕으로서의 실재감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작가는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지혜로운 통치자의 위엄과 젊은 광채가 얼굴에 은은히 배어 나오도록 표현하였다. 동시에 희끗한 머리칼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국정의 안정을 위해 깊이 사유하는 군주의 내면 또한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처럼 손연칠이 형상화한 선덕여왕의 초상은 고대 사료에 기록된 이미지를 단순히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인물을 현재적 감각 속에서 다시 호명하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생동하는 역사적 실체로 현현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본 진영의 소장처는 대구 팔공산에 자리한 부인사이다. 부인사는 신라시대부터 선덕여왕을 기리는 의례가 전승되어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조선시대에 까지도 선덕여왕의 영정을 봉안한 숭모전(崇慕殿)’이 존재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면서 숭모전 또한 함께 사라졌다.

 

1930년대 초 비구니 허상득 스님의 중창 불사를 통해 사찰이 다시 정비되었고, 중창이 마무리되던 1938년 무렵 당시 일본에서 수학 중이던 화가 정종여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여 선덕여대왕 상을 벽화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화는 현재 사진 자료로만 전해질 뿐, 벽화가 있었던 건물의 정확한 기록이나 해체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는다.

 

부인사는 1991년 선덕여왕 초상을 다시 제작하여 봉안하고자 숭모전을 독립 건물로 신축하였다. 이때 새로운 초상화 봉안하기 위해 당시 대구 지역에서 극장 간판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던 화가에게 제작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참배객들 사이에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이 제기되면서 재제작에 대한 요구가 점차 높아졌다.

 

이후 지역 대학의 모 교수에게 다시 초상 제작이 의뢰되었으나,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초상의 완성도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자 사찰은 오랜 기간 재제작 문제를 숙고하게 되었다결국 지역구 유승민 국회의원의 협조와 대구시의 지원을 통해 선덕여왕 영정 제작은 정부의 공식 표준영정 제작 사업으로 추진되기에 이른다.

 

정부표준영정 제작 과정은 상당히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심의 기간에 따른 제작은 통상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며, 작가의 역량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과정이 3년 이상 길어지기도 한다. 정부표준영정 심의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위촉한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역사적 고증과 예술적 심의를 거친다. 최근에는 과거와 달리 작품의 수준이 일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지정 번호가 부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국가적 상징물로서 영정의 권위를 높이고, 역사적·예술적 신뢰성을 확보하려는 제도적 변화라 할 수 있다.      

 

 

<허난설헌 상>: 내적 품격의 여인 초상화

(2008년. 비단 바탕. 167x117cm. 허난설헌 기념관 소장)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시대 여성의 한과 예술적 감수성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자 문인으로,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다. 뛰어난 한문 시문 능력으로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과 함께 학문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어릴 때부터 시재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중국 고전과 시문에도 능통하였다. 그러나 혼인 이후 불행한 결혼생활과 두 자식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었고, 이러한 상처는 그녀의 시 세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그녀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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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은 주로 한시(漢詩)를 남겼으며, 섬세한 감정과 여성적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하였다. 작품에는 현실의 고통과 한(), 자연에 대한 동경, 그리고 이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조선의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억눌린 여성의 삶과 내면을 시적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곡자(哭子)는 자식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으로, 그녀의 개인적 비극과 정서를 잘 보여준다.

 

사후에는 동생 허균이 그녀의 작품을 모아 난설헌집으로 간행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조선 여성 문인의 대표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손연칠 작가는 2008년 정부표준영정 제작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정부표준영정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작품을 공식 인증받았다. 이후 조선 중기 여성 복식에 대한 새로운 출토 자료들이 확인되면서 초기 작품의 고증 상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다시 제작하게 되었다.

 

난설헌은 난()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삶과 감정을 투영하였고, 꽃다운 젊음의 정한을 난초에 비유하였다. 난은 곧 그녀의 이름이자 정신적 표상으로 이해된다. 구한말 학자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에는 천재로서 일곱 살에 이미 시를 지었으므로 여신동이라 불렸다. 성품이 신선과 같아 늘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향을 피운 채 책상 앞에서 시문을 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학자 문일평은 규방시인 허난설에서 그녀가 신선 세계를 동경하여 관련 시를 다수 남겼음을 언급하였다.

 

무석은 허난설헌의 초상을 재현함에 있어, 단아하고 청아한 분위기와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성격, 그리고 깊은 감정이 깃든 고요한 인상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전한다. 이는 실존 인물의 외형 재현을 넘어, 문학적 이미지와 정신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양만춘장군 상>: 불굴의 기개와 무인(武人) 초상의 전형

(정부표준영정. 2002. 비단 바탕.

180x11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양만춘 장군은 안시성의 방패이자 고구려의 기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손연칠은 붓끝을 통해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강인한 무인의 혼을 현현(顯現)시켰다. 작가는 장군의 기개를 형상화하기 위해 힘 있고 명확한 선묘를 구사하며, 특히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은 당나라 대군에 맞선 영웅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앞서 살펴본 <선덕여대왕 상>이 부드러운 선염(渲染) 위주였다면, <양만춘 장군상>은 안면의 골격을 강조하는 선염 처리를 통해 전장의 긴박함을 견뎌낸 무인의 견고한 신체성을 형상화한다. 이는 기록이 전무한 고구려 영웅의 모습을 민족적 자긍심의 표상으로 구축한 것이며, 당당한 조형미를 통해 한국 무인 초상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정부표준영정. 2025년. 종이 바탕에 채색. 180x115cm. 영암 대가야박물관 소장)

         

<의병장 양달사 상>: ()과 효()가 교차하는 시대정신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를 그린 이 영정은 양만춘 장군과는 또 다른 미학적 결을 보여준다. 현감(縣監)이라는 신분적 배경을 반영하여 안면의 피부는 맑고 유려하게 처리되었으나, 전장에 임하는 단호한 표정에는 국난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다.

 

특히 담백한 의복 색조와 대비되는 철선묘(鐵線描)의 강렬한 필선은 조선의 근검한 사회적 분위기와 선비 정신을 절묘하게 연출한다. 상중(喪中)에 의병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거친 질감의 삼베 철릭을 입히고, 명궁(名弓)이었다는 구술을 바탕으로 활을 든 모습을 설정한 것은 고증과 예술적 상상력이 결합한 전신(傳神)의 결과다. 이 영정은 단순한 초상을 넘어, 유교적 가치관인 충()과 효()가 한 인물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시각적으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