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검증을 통한 미학적 안착
이랑 초상화의 중요한 점은 작가 개인의 실험적 시도에 머물지 않고, 정부표준영정과 화폐 초상이라는 가장 엄격한 제도적 검증대를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일랑의 초상화가 반복적으로 국가 이미지의 중심부에 채택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의 초상 인식이 특정한 시대의 일시적 미감이나 화가의 주관적 개성에 경도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장기적인 국가 기억을 보존하고 공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견고한 조형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일랑 이종상은 전통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화가’에 머물거나, 국가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수행한 ‘기능공’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통의 미학적 정수와 국가 제도의 상징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초상화의 문법을 현대적으로 안정화하고 완성한 ‘미학적 종합자’ 였다.
한편 그의 제자 무석에 따르면, 일랑은 제자들을 지도할 때 독특한 교육 방법을 활용한다고 전한다. 그는 제자들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적절한 고사(古事)를 찾아 예를 들어가며 알아 들을 때 까지 설득하면서 오직 언어를 통해 가르친다. 다시 말해 제자의 밑그림이나 화판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숙제를 제시할 때는 문제를 던지는 방식으로 접근하며, 정답을 주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유태인 교육 방식을 철저히 따른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역할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 상>: '철선묘(鐵線描)'의 정수와 대륙적 기개
일랑은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의 권위자답게, 단순한 상상력이 아닌 철저한 벽화 분석을 토대로 영정을 구성했다. 장보고 영정에서 통일신라 복식을 고증했듯, 광개토대왕 상에서는 무용총과 강서대묘 등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특유의 복식 구조와 문양을 완벽히 재현했다. 이는 인물을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실체로 변모시켰다.
장보고 영정은 선이 '명확함'을 강조했다면, 광개토대왕 상의 선은 '강인한 골격'에 집중한다. 쇠줄처럼 단단하고 힘찬 철선묘(鐵線描) 기법을 사용하여, 대륙을 호령하던 정복 군주의 강인한 의지를 표현했다. 안면에서는 짙고 굵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을 감싸는 선들은 마치 고구려의 기와나 전돌처럼 단단한 질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의복의 주름(의습)은 장보고 영정보다 더욱 굵고 힘차게 뻗어 나가며, 금방이라도 말에 올라타 북방으로 달려 나갈 듯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색채의 상징성으로 고구려의 붉은 기운이 돋보이는 특징을 살리고 있다. 장보고 영정이 정갈한 짙은 색조로 내면적 위엄을 드러냈다면, 광개토대왕 상은 고구려 특유의 강렬하고 웅혼한 색채를 사용했다. 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붉은색과 황토색 계열을 주조색으로 사용하여 대륙의 토양과 정복자의 열정을 형상화했다. 또한 배경을 생략하거나 단순화함으로 인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권위와 아우라에만 시선이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륵 선생상>: 신경계처럼 살아있는 선묘의 생동감
가야금의 명인 우륵을 형상화한 이 영정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과 ‘고결한 정신’을 선(線)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가야금을 타는 거장의 집중력을 드러내는 예리한 눈매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자아내며, 섬세하면서도 탄력적인 안면의 윤곽선은 인물의 내면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선 중심의 안면 묘사가 채용신이나 김은호, 심지어 운보와 월전에게서조차 발견되지 않는 독자적인 방식이다. 이는 조선 후기 이명기 계열의 운염법의 전통을 넘어, 윤두서와 변상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 중심의 전통’을 일랑 자신이 고증적 연구를 통해 현대적으로 환원한 결과다. 인물의 신경계처럼 살아 움직이는 선 하나하나가 생동감을 부여하며, 절제된 색채 대신 명확한 필선이 예술적 카리스마를 완성하고 있다.

<원효대사 상>: 필선의 구축적 기능과 무애(無碍)의 기상
한국 불교의 성사 원효를 그린 이 영정은 ‘구도자’이자 ‘사상가’로서의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스승 월전 장우성이 안면의 요철을 부드러운 운염(暈染)으로 갈무리했다면, 일랑은 원효의 얼굴에서 광대뼈와 눈썹 등 골격의 흐름을 단단한 선적 요소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처리는 원효의 거침없는 무애(無碍) 사상을 강인한 시각적 형상으로 치환한다.
특히 의복(가사)을 표현한 굵고 힘찬 필선은 꺾이고 중첩되며 인물의 입체적 양감을 형성한다. 이를 ‘필선의 구축적 기능’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는 선 자체가 마치 건축물을 세우듯 인물의 구조적 부피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한다.
일랑 초상화의 전승과 현대성
1) 육리문법(肉理紋法)의 현대적 계승과 고증의 미학
일랑의 초상화 안면부에는 얼굴의 근육 방향을 따라 미세한 선을 긋는 조선 후기 전통 기법인 육리문법이 정교하게 적용되었다. 이 미세한 필선 들이 중첩되며 형성하는 안면은 단순한 입체감을 넘어, 피부밑의 골격과 그 안에 갈무리된 기운(氣)을 시각화한다. 이는 일랑이 월전으로부터 전수 받은 전통 기법을 본인만의 선묘 철학으로 다시 환원하여 발전시킨 주체적 계승의 결과이다.
2)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실현: 선묘의 독립성과 역사적 전신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한다’는 전신사조의 원칙에 입각하여, 일랑은 인물의 눈빛 속에 관람객을 압도하는 강렬한 응시를 담아냈다. 이는 그가 동국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득하며 다진 인문학적 통찰력이 초상화라는 매체를 통해 예술적으로 발현된 지점이다.
일랑 이종상 초상화의 가장 독보적인 특징은 안면과 의습 전반에 걸쳐 선묘(線描) 자체가 지니는 독립성과 생명력을 자각하고 이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운보 김기창의 구성적·외형적 조형 원리와 월전 장우성의 운염 중심 안면 처리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즉, 일랑에게 선은 형상을 규정하는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인물의 역사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본질적 조형 언어로 기능한다.
3) 선묘 전통의 재발견과 현대적 재해석
일랑의 안면 표현은 강세황, 이명기, 이재관을 거쳐 월전으로 이어지는 ‘운염 중심의 안면 인식 계보’와 뚜렷한 변별점을 지닌다. 그는 윤두서, 변상벽, 진재해로 이어지는 선 중심 초상 전통에서 확인되는 윤곽선의 조형적 자율성과 필선의 구축적 기능을 포착하여 이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구축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랑의 초상화는 전통의 단절된 마디를 찾아내어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시 맥동하게 만든 학구적 집념의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초상화에서 윤곽선은 단순히 형태를 둘러싸는 외곽선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조형 요소로서 안면의 구조와 긴장을 주도한다. 선은 운염에 의해 해체되거나 은폐되지 않고, 오히려 선 자체가 형상을 이끌며 인물의 존재감을 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필선은 형태 묘사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인물의 기운과 위상, 정신적 긴장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이러한 선 중심의 안면 인식은 초상을 ‘닮음의 재현’이 아니라, 필선을 통해 인물의 본질을 구축하는 조형 행위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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