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무석 초상화의 현대적 전신(傳神) 1

천년의 걸물 2026. 4. 10. 19:08

이 시대의 초상: 교감의 확장과 현대적 변용

2010년 동산방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 이 시대의 초상전은 무석의 초상 미학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 교감의 영역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준 중요한 계기였다. 그는 스승 황수영과 이종상을 비롯하여 고은, 임권택, 김종규, 김남조, 이애주, 윤범모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오랜 유대를 화폭에 담았다. 이 작업에서 그는 대상의 외형적 형사(形似)에 매몰되지 않고, 각 인물의 삶의 궤적이 투영된 내면의 깊이를 포착해 냈다. 화면 구성 또한 전통적 규범을 응용하되, 인물의 성격에 맞춰 새로움을 추구하는 무석 다운 유연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육리문법의 현대적 재해석

무석의 초상화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육리문법(肉理紋法)의 치밀한 변용이다. 그는 서구 인물화의 근간인 외적 명암(빛의 작용) 표현을 과감히 방기(放棄)하는 대신, 미세한 붓질을 수없이 중첩하는 방식으로 안면의 요철과 결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인물의 개성과 진솔한 표정을 담채(淡彩)의 섬세한 필치로 포착해 낸 그의 사실성은 가히 동양적 초상 미학의 승리라 부를 만하다. 이는 이한철, 채용신, 이종상으로 이어져 온 육리문의 계보를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의 생리적 사실성으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성취다.

 

손연칠 작. <황수영 상> 1988년. 67x64cm. 비단 바탕. 개인소장

 

<황수영 상>: 학자적 현대 지식인의 초상

초전(草田)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의 기틀을 닦은 거목으로 동국대학교 총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의 주임교수로 제직 당시, 그의 제자가 된 손연칠 화백이 평생 가르침을 받아 존경해 마지않은 스승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황수영 박사는 '현장을 발로 뛰는 학자'로 불리며 한국 미술사의 암흑기를 밝힌 인물이다. 특히 그의 대표적 연구 성과는 석굴암 연구 및 보존의 선구자로서 석굴암의 구조와 도상학적 의미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된 석굴암의 복원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다. 또한 문화재 발굴의 주역으로서 1960년대 단양 신라 적성비, 문무대왕릉(대왕암) 등을 발견하고 조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 고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고고미술사학의 1세대인 고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의 제자로서 불교미술의 체계화 한국 불교 조각사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미술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초상 작품은 그가 그린 <노인 상>이나 <성호 이익 영정>과는 또 다른 '현대 지식인의 초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측면 7분면(側面 七分面) 구도로서 정면보다는 약간 옆을 응시하는 구도를 선택하여, 평생 유물을 관찰하고 탐구했던 학자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색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필치를 통한 인자한 노년의 학자적 풍모이며 피부 톤을 밝은 붉은색으로 전면을 도포해 따뜻한 인상을 풍기도록 하였으며 평소 인품으로 알려진 '부드러운 선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으며. 인자하면서도 형안(炯眼)을 지닌 눈매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학문적 권위보다는 인격적인 성숙함을 돋보이게 한다.

 

황수영 초상화는 학자 특유의 온화함과 학문적 집념이 공존한다. 전통적 전신사조(傳神寫照)를 현대적 감각으로 조형화한 이 작품은, 특히 안면의 윤곽을 짙고 강렬한 필선으로 거침없이 운필(運筆)한 대목이 압권이다. 한국 미술사의 기틀을 닦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노학자의 숭고한 정신과 온화한 성품을 한 폭의 화면에 응축해낸 절창이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연칠 작. <이종상 상>부분도. 2010년. 비단 바탕. 70x55cm. 개인소장

 

<이종상 상>: 형사(形似)를 넘어 전신(傳神)에 이르다

한국 초상화계의 거목이자 스승인 일랑(一浪)을 그린 이 작품은, 초상화의 정통 맥을 이어받은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장엄한 헌사이자 예술적 역량의 결정체다.

작가는 각별한 사승(師承) 관계 속에서 체득한 스승의 내면을 가감 없이 펼쳐 보였다. 특히 전통 육리문법(肉理紋法)의 미학적 정수를 보여주듯, 고심어린 안면의 근육과 미세한 피부 결의 변화를 진솔하게 추적한 필치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는 눈매에 있다. 인물의 정신이 깃드는 안광(眼光)을 통해 매사를 깊이 있게 통찰하는 스승의 날카로운 기개를 오롯이 담아냄으로써, 외형의 재현을 넘어 인물의 정신적 본질인 전신(傳神)을 완벽히 구현해 냈다.

 

손연칠 작. 〈김종규 상〉 2010년. 비단 바탕. 70×55cm. 개인 소장

 

<김종규 상>: 육리문법으로 구축한 인격의 결

문화예술계의 원로인 김종규 회장과 무석은 작가의 고비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오랜 인연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제작된 <김종규 상>은 무석의 육리문법(肉理紋法)이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정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안면의 굴곡과 고심세(高深勢)에 따른 미세한 피부 결의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진솔하게 추적한다. 특히 살며시 뜬 눈의 홍채를 반개법(半開法)으로 묘사하여 인물의 내면적 깊이를 절묘하게 표상하였다. 이는 전통 초상이 지향하는 '형사(形似)'를 넘어 인물의 정신성을 온전히 전달하는 '전신(傳神)'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손연칠 작. 〈임권택 상〉, 2010. 비단 바탕. 70×55cm. 개인 소장

 

<임권택 상>: 거장의 고뇌를 담아낸 면염(面染)의 미학

임권택 감독과 무석의 인연은 조선의 화가 장승업의 삶을 다룬 영화 취화선의 제작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이 특별한 조우는 작가가 거장의 내면세계와 심상(心象)의 궤적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권택 상>(사진 77)은 명확한 선묘에 의존하기보다 얼굴의 근육과 결을 따라 층층이 쌓아 올린 면염법(面染法)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결과물이다.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감독의 눈빛에는 예술가로서의 깊은 고뇌가 서려 있으며,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피부의 독특한 질감은 손연칠 특유의 육리문법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되었다. 이는 전통 기법이 현대 인물의 복잡다단한 내면과 시대적 표정을 어떻게 포착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독보적인 성취다.

 

손연칠 작. <황수로상> 2012년. 비단 바탕. 170x100cm. 개인소장

 

<황수로 상: 십 년의 고뇌가 빚어낸 미완의 전신(傳神)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宮中採花) 기능보유자 황수로를 모델로 한 이 대작은, 전통 복식을 갖춘 현대 여성의 품격을 동시대적 시각으로 어떻게 치환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미학적 문답이 응축된 산물이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과감한 여백으로 비워내거나 인물을 비대칭으로 배치하여 발생하는 시각적 긴장감을 조율하기 위해, 작가는 인물 후면의 공간 구성을 수없이 수정하며 완벽한 조형적 보완을 꾀하고 있다.

 

작가는 2012년부터 이어온 이 작업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완성'이라 규정한다. 스스로의 미숙함을 보완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초상화가 단순히 외형적 닮음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대상과 작가의 정신이 온전히 합일되는 지점을 찾아가는 치열한 수행의 과정임을 방증한다. 붓끝의 선 하나, 구도 한 점의 배치조차 허투루 허용하지 않는 무석의 집요함은 초상화라는 장르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